11화. 서약의 이도류(3)
깨어나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아직도 수마에게 몸을 바친 채로 팔 안에서 자는 여자애한테 어떻게 용서를 빌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발칙한 자세로 있을 수도 없으니 리즈가 깨지 않도록 살짝 몸을 일으킨다. 딱딱한 암반을 베개로 삼아 아침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나고 나서 매우 상쾌했던 것은 틀림없이 어젯밤의 안는 베개의 품질이 최상급이었기 때문이리라.
이거에 관해서는 엎드려 조아려서 성심성의 관용을 바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민하면서도, 서서히 아침 식사 준비를 진행시킨다. 어젯밤과 똑같이 간단한 수프를 만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랜턴에 실은 포트를 멍하니 바라보고 나서 잠시 후, 뒤에서 리즈가 일어나는 소리를 신호로 조용히 스로잉 대거를 꺼내 특정한 목표를 정하지 않고 암벽을 목표로 삼아 내던졌다. 리즈로서는 내가 엉뚱한 짓을 하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던진 대거는 암벽에 꽂히자 붉은 라이트 효과를 흩날리면서 얼마 안 가 내구치 한계를 맞이해 소멸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을 정도다.
「좋은 아침이야, 키리토. 이른 아침부터 뭐하고 있는 거니?」
「좋은 아침이야, 리즈. 잠깐 실험이라고 할까 확인할 게 있어서. 일어났다면 이쪽으로 와봐. 마침 수프도 다 됐거든.」
그리고 나서 한동안 나와 리즈는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지냈지만, 나는 때를 가늠하고 입을 열었다.
「리즈, 어제 일 말인데――」
「스토옵! 그 얘기는 그만. 그때는 나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고, 지금도 조금 혼란해. 그러니까 내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부탁이니까!」
우선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사과하기로 결심하고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바로 그 리즈가 완고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뺨도 약간 불그스름해져 있고, 매우 빠르고 강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한다. 리즈가 부끄러워하는 원인은 어젯밤에 감정을 드러내면서 한 행동일까, 아니면 내 가슴 안에서 잠들어버린 것일까. 추궁해보고 싶다는 장난기가 약간 뭉게뭉게 솟구쳐왔지만, 필사적으로 자제해서 억눌렀다.
「그래서, 한 번 더 묻겠는데, 너 뭘 한 거니? 검을 투척하는 스킬을 확인하려 한 거니?」
수프가 든 컵을 받은 리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는다. 하긴 리즈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상할 만도 하다. 일어나자마자 본 것이 내가 스로잉 대거를 투척하고 있는 광경이었으니 고개를 갸웃거리고 싶어지는 심정도 알 수 있다.
「그거 말인데, 이 함정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내 질문이 조금 갑작스러웠는지 리즈는 내 반문에 눈을 깜빡인 뒤, 한 번 더 내 말을 음미하듯이 미간에 주름을 지으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없어하는 투로 입을 연다.
「으음, 이상하다고 해도 말이지. 함정으로 치자면 그렇게까지 엉뚱한 건 아니라고 보고, 굴러 떨어져 죽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위험도의 높이가 미궁 구역과 맞먹는다는 것 정도일까. 크리스탈 무효화 공간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더하면 매우 악질적인 장치라고 보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어제까지는.」
「에둘러 말하지 마. 그래서 키리토는 뭐가 마음이 걸린다는 거니?」
정답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 분했던 걸까, 아니면 내 에둘러 대답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리즈는 입술을 날카롭게 하면서 불만스럽게 내 얼굴을 응시해 왔다.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리즈다운 말투다.
공략파에서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위로 보이는 자들과의 속마음 캐내기라든가, 교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때 그때의 술책을 써야 했던 나날을 떠올리자, 리즈와의 경쾌하고 교묘한 대화의 응수에 자연스럽게 표정이 느슨해져버린다. 만난 당초부터 리즈와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느끼고 있던 것은 분명 그런 공략파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날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아르고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사양할 필요가 없는 거리감이 마음이 편했다.
「그 답은 이미 너 자신이 파악했을 텐데?」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척하는 건……」
말하는 도중에 리즈가 뭔가를 알아챘는지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다.
나는 한 번 더 품에서 스로잉 대거를 꺼내 검을 투척하는 스킬을 기동시켰다. 암벽을 향해 투척한 단검은 조금 전과 똑같이 붉은 라이트 이펙트를 흩날리면서 소멸한다. 그 일련의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즈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키리토가 말하고 싶은 건 알았어. 아인크라드에서는 건축물이나 나무, 암벽 등은 기본적으로 파괴 불가능 오브젝트로 지정되어 있어. 특수한 퀘스트가 아니면 그 원칙은 무너지지 않아. 그런데 지금 우릴 둘러싸고 있는 암벽은 왜인지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어. 검이 튕겨나가지 않고 내구치가 감소하는 것 자체는 보통 있을 수 없는 현상이야.」
「바로 그거야. 나도 어제는 매우 초조해져 있었거든. 네가 맡긴 검이 소멸한 시점에서 알아챘어야 했어.」
한심한 이야기다. 여기가 게임 세계라는 걸 잊고 현실의 법칙에 사로잡힌 나머지 눈이 흐려졌다. 무엇보다도 냉정함을 잃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상황이 몸과 마음을 압박해 시야를 현저하게 좁히고 있었다. 하룻밤 휴식을 취하고 나서 간신히 머리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떨어져 내릴 때 발판으로 삼았던 얼음도 뭔가 게임적인 작위가 느껴져. 함정 치고는 설치한 장소의 맥락이 없다고 할까……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
「거기다 크리스탈 무효화 공간에 잡아두면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구멍. 굴러 떨어져 죽을 위험성이 있다고 해도 탈출할 수 없게 한 것에 비해서는 그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어. 편파적이라고 할까, 일부러 가둔 의미가 없지. 이 세계에서는 굶어죽을 일도 없고. 진심으로 탈출할 수 없는 함정으로 정신적인 고문을 꾀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지금까지 카야바가 해온 방식을 생각하면 역시 부자연스러워. 이 장소에서 몬스터가 연달아 나타나는 게 차라리 《카야바다운》 연출이야.」
「얘,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비난하는 투로 말하는 리즈에게 미안하다고 한 마디 사과해 둔다. 역시 정신적 고문이라든가 하는 건 불길하다. 나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지만, 만약 진짜로 평생 여기에 갇히게 된다고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솔로가 아니었던 것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런 상황에 혼자 내던져지기라도 하면 미쳐버리겠지. 리즈에게 거듭 고마워해야겠다.
「키리토는.」
「응?」
「만약, 만약의 이야기인데. 우리 둘 다 여기서 탈출할 수 없다고 한다면 키리토는 어떻게 할 거니?」
지금 말한 내 불길한 상황 분석이 리즈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 걸까. 그 말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던 가능성을 생생하게 상상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역시 내 대인 스킬은 성장하지 않았군. 상대방을 배려하는 수준이 너무 부족하다.
「으음, 매일 자며 지내는 거? 소식은 자면서 기다리고 말이지.」
「그게 뭐야. 너무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거 아니니?」
물론 진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키리토라는 플레이어의 가치――돋보이는 전투 능력을 자각하고 있는 내가 그런 안온한 선택지를 택해도 될 리가 없다. 무슨 인과인지 히스클리프와 대등하다고 칭해질 정도로 내 이름은 널리 알려져버렸다. 그 남자와 함께 공략파의 쌍벽이라 불리는 것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지만, 강함이라는 점에 한해서 나는 공략파의 지주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무책임하게 이탈하는 것이 용납될 리가 없다. 제100층, 즉 그랜드 보스에게 다다르려면 아직도 긴 도정이 필요하다. 이런 곳에서 리타이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기력해진 리즈를 조금이라도 기분 풀어주려고 농담을 말해봤지만, 나한테 농담하는 센스는 전무하니까 말이지. 어떻게 한다.
「재미없는 대답은 마음에 안 드려나. 그렇다면 모처럼 리즈가 있어주고 있으니 내가 잘 때는 무릎 베개라도 해준다는 건 어때?」
……잠깐, 난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바보 같잖아.
리즈가 잘 때는 내가 팔베개라도 해주겠다고 장난기를 담은 말이 이어서 뛰쳐나오기 직전에 어떻게든 참는 것에 성공했다.
아니지 아니지, 이건 성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잖아? 무릎 베개 발언만으로도 충분히 성희롱이다. 큰일났군, 평상시의 버릇으로 그만 농담을 해버리고 있었다. 아르고라면 몰라도, 어제가 첫 대면인 여자애한테 해도 될 말이 아니다. 하물며 어젯밤을 떠올리게 하는 화제인 시점에서 아웃이다. 아아, 내 배려 없는 면이 마이너스 방면으로 관통해 간다.
아니나 다를까, 리즈는 실로 예상대로인 반응을 보였다. 뺨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면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미안, 지금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미안해, 잊어줘. 배려가 부족했어.」
「……딱히 상관없긴 한데. 넌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해대고 있는 거니?」
리즈는 그러다 찔려도 모른다면서 국어책을 읽는 투로 충고했다, 눈은 반쯤 뜬 눈으로 매우 질려 있다고 온 몸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하다. ……이 경우는 리즈가 감추지 못하는 뺨의 홍조에 관해서는 접하지 않는 게 좋다. 리즈의 허풍을 지적했다고 상황이 호전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 내가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있는 이성은 한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거든. 공략파의 솔로 플레이어라는 직함은 겉치레가 아니라고.」
「있잖아, 키리토. 그건 자랑할 점이 아니야.」
의미도 없이 가슴을 펴는 나에게 리즈는 이번에야말로 기가 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말하면서 슬퍼졌다. 다만 내 경우는 고고함을 뽐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시간과 스킬 문제로 교우 관계가 좁을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 두고 싶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미궁 구역에 기어들어가고, 가끔 마을로 돌아가면 무기 정비나 소모품 보충을 끝마치고 나서 미궁 구역으로 들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공략 회의에 참가하거나, 플로어 보스전 전날 밤에 쉬는 사이에 아르고와 정보 교환을 하거나, 포션 작성 스킬의 숙련도 올리기에 힘쓰는 사치의 상태를 보러 가거나 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나에게는 전투와 탐색 이외에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
언젠가 히스클리프에게 충고를 받고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게 된 아스나가 하필이면 날 걱정해서 강제적으로 휴가 때 데리고 나갈 정도로 살벌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공략파에서도 바쁜 몸으로 알려진 혈맹 기사단 부단장조차 걱정하는 타임 스케줄로 움직이고 있는 생활로 교우 관계가 넓어질 리가 없다.
……아무튼 어떤 도리를 내세워도 내 대인 스킬이 잔뜩 녹슬어 썩어가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내가 봐도 무모한 생활 주기다. 이중적인 의미로 자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으흠, 하고 일부러인 것처럼 헛기침을 한다. 이 화제는 위험하다.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내가 슬퍼진다.
「이야기를 되돌리자. 우리가 있는 이 구덩이는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 어제 내가 벽을 달린 건 기억하고 있지? 개그 같은 인간형 구멍이 생겨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해. 통상 파괴 불가능 오브젝트로 지정되어 있는 벽이나 바닥이 어중간하게 설정이 해제되어 있고.」
「그러고 보니 그 얼빠진 구멍도 어느새 수복되었지. 아, 그래서 네가 어중간하다고 말한 거구나. 완전히 해제되어 있다면 수복되지도 않고, 가로로 된 굴을 파서 나아간다는 탈출 방법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짧은 시간에 검의 내구치 한계까지 깎인 것을 생각하면, 설령 벽을 부술 수 있다고 해도 가로로 된 굴을 파서 나아가는 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게임이라면 전용 곡괭이라도 준비해야 할 이벤트야.」
아무튼 암벽이나 눈이 남은 바위 형태를 한 시스템 보호가 부분적으로 해제되어 있을 뿐이지,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게임……게임이라. 그러고 보니 이 세계는 게임 세계였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평상시에는 잊고 있는 게 정신 건강상 좋을 것 같지만, 오늘에 한해서는 여기는 게임 세계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게임적인 연출 안에 있는 거야. 클리어 조건을 알 수 없는 퀘스트, 맥락이 없는 함정, 부분적으로 시스템 보호가 없는 파괴 불가능 오브젝트, 무엇보다도 탈출 불가능인데도 한가롭게 밤을 지새울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있던 것. 하나하나를 뿔뿔이 흩어놓고 보면 의미불명하지만,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뭔가 보이는 것이 있어.」
알고 보면 별것 없는 이벤트지만, 그걸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퀘스트는 지금까지 방치되어 왔다. 우리도 하마터면 헛다리를 짚을 뻔했다. 이렇게 보면 내가 백룡과의 전투를 오래 끈 것도, 얌전히 숨어 있지 못한 리즈의 실패도 결과 올라잇이었던 거다.
「……우린 함정에 걸린 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벤트 트리거를 발동시키고 있었다는 건가? 그 함정은 백룡과 싸우는 것이 출현 조건이었다는 얘기니?」
「대장장이를 동행시키는 조건은 그야말로 있을 법하지만, 거기서 백룡을 쓰러뜨리기 전에 이 구멍을 발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백룡이 떨어뜨린 것이 폐급 아이템인 것도 설명할 수 있어. 그 백룡은 어디까지나 이벤트 트리거이지, 퀘스트 보스 같은 게 아니라는 거야.」
「짓궂은 장치네. 저런 대형 몬스터가 배치되면 누구나 쓰러뜨리려고 기를 쓰게 될 텐데.」
「이 게임을 만든 자가 누군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해했어.」
리즈가 체념을 섞어서 맞장구친다.
카야바 아키히코를 마음씨 좋고 솔직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이 세계에서 누구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남자에 대한 불만과 원망의 말은 잔뜩 쌓여 있다. 이 세계를 운영하는 게임 마스터의 악랄함은 개시 첫날에 모든 플레이어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정도가 커질 일은 있어도 작아질 일은 없다.
「지금은 제작자가 악질이라는 건 잊어 두자. 그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까.」
「확실히 그래. 거기다 우선 여기서 탈출해야 하니까.」
「그 전에 목적인 아이템을 회수해야지. 지면을 깎을 수 있는 힌트는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져 있었어. 거기다 이 구덩이 자체가 상당히 정확한 원기둥 형태가 되어 있으니까, 이런 경우는 퀘스트 아이템을 숨긴 곳도 그걸 모방한 걸 거야.」
구체적으로는 원의 중심이다. 게임뇌를 구사해서 수많은 힌트로 짐작이 가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적당히 눈을 밀어 헤치고 지면을 조금씩 파면서 나아가자 바로 목적인 아이템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카야바도 여기서 약속을 어기는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직사각형 물체. 두 손바닥에서 조금 보이는 정도인 크기를 지닌 그것을 살그머니 오른손 손가락으로 탭하자, 곧바로 아이템 이름이 출현했다. 《크리스탈 라이트 주괴》――리즈가 예측한 대로 대장장이가 사용하는 금속 소재였다.
「어쩐지 좀 보람이 없다는 느낌이네. 솔직히 백룡의 레어 드랍으로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혜를 짜내라고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지만.」
리즈가 불만스럽다기보다는 어딘가 김 빠진 투로 말한다. 얼굴에도 복잡해 보이는 기색이 보이고 있다. 어제 이 구덩이에 떨어져서 죽을 뻔했으니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맛본 노력과 공포에 비하면, 수수께끼를 풀기만 하면 아이템 입수 난이도가 오히려 낮은 만큼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는 것이 있는 거겠지.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리즈의 심정도 안다. 그렇기는 해도 원래 불합리한 세계다, 일일이 신경 쓰고 있으면 끝이 없다.
「일단 목적은 달성했으니 기뻐하자고. 자, 받아.」
「와왓, 갑자기 던지지 마.」
쓴웃음을 지으면서 리즈에게 가볍게 주괴를 던진다. 인고트는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리즈가 내민 양손에 들어갔다. 리즈가 자기 손안에 있는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 주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런 리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거 용의 배설물일 가능성이 높아」라고 충고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모르는 게 좋은 것은 이 세상에 많이 있으니 입다물고 있자.
크리스탈 라이트 주괴를 용의 배설물이라고 예상한 것은 여기가 용의 둥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용의 침상인데 왜 입구가 눈과 얼음으로 숨겨져 있냐고 따지고 싶어지지만, 그것은 게임적인 연출이라는 거겠지. 이거 보라는 듯이 구멍을 파 둘 수도 없고, 어쩌면 이 구덩이 자체가 출현 포인트가 고정이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백룡이 출현한 장소 근처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출현한다든가. 생각해보면 용의 돌진으로 발판이 무너졌다는 것도 뭔가 작위적이다. 용의 둥지 입구와 백룡과의 전투는 역시 관련지어서 생각해야 할 조건인 걸까. 정보상에는 그런 점도 강조해서 퀘스트 정보를 흘리도록 할까.
「좋아, 아이템 수납 완료. 그런데 키리토, 너 매우 침착하게 있는데 탈출할 방법을 떠올리기라도――」
그때 리즈의 말을 차단하는 형태로 상공에서 한층 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렸다. 잊을 수 없는 어제 싸운 백룡의 울음소리다.
「……저기, 키리토. 혹시 여기는 용의 둥지이기도 한 거니?」
뒤늦게나마 리즈도 그 가능성을 알아차렸는지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마도.」
「산기슭 마을에서 모은 정보 중에 드래곤은 야행성이라는 정보가 있었잖아. 지금은 아침이지, 그렇게 되면――」
「침상으로 돌아온다는 게 당연한 행동이지.」
「그렇겠지―」
하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을 흘린 뒤 잠시 침묵. 감정 효과라도 있다면 리즈의 뒤통수에라도 굵은 땀을 표현해 두고 싶다고 할까. 지금 상황에는 딱 맞다. 나는 이 사태를 환영하고 있기 때문에 미소를 감추느라 필사적이지만. 이렇게까지 게임적 연출을 해주니 기쁠 따름이다. 될 수 있으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기를 원하는 바다.
「여기는 전투를 재개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보는데……키리토, 괜찮겠어?」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내 뒤로 물러나줄래? 그리고 포션 준비도.」
「알았어.」
솔직하게 리즈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나도 만약을 위해 일루시데이터를 뽑아 불측의 사태에 대비해 둔다. 리즈에게 말한 대로 전투가 벌어져도 쓰러뜨리는데 그리 애는 먹지 않을 테지만, 될 수 있으면 그런 전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 끝까지 게임에 걸맞는 연출을 관철해다오, 카야바.
그런 소원을 빌면서 머리 위를 올려다본다.
하얀 빛이 찔러 들어오는 상공으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가까워져 왔다. 콩알 같았던 모습은 이미 옛날이고, 시야 앞에는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는 거대한 드래곤이 있다. 다시 보니 정말 박력이 있군.
전번 전투의 마지막에 보인 급강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우아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로 조용히 착지하는 백룡은 그대로 몸을 가라앉히면서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의외로 자기 침상에 난입한 세련되지 못한 침입자를 거북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바로 전투로 돌입하는 것도 아닌 그 모습에 마음을 놓고 한숨을 내쉰다. 예상한 범주라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되자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무래도 탈출할 전망도 보인 것 같다.
「저기, 키리토. 이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이른바 약속이란 거겠지?」
괴이쩍게 묻는 리즈를 돌아보고 한 번 어깨를 움츠리고 나서 검을 칼집에 수납한다. 리즈에게도 무기를 수납하라고 신호를 보내자, 리즈는 한 번 백룡에게 눈길을 돌리고 크게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어딘지 모르게 전개를 읽어낸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게임 요소가 강한 이벤트와 조우하는 건 처음이야.」
「확실히 전형적인 게임 이벤트지. 이것이야말로 RPG라는 느낌이랄까. 이것으로 이 세계가 정당한 VR MMO RPG라면……」
「말하지 마. 허탈해지니까.」
둘이서 얼굴을 마주 보고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이 세계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다면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가. 게임을 사랑하는 인종에게 있어서 소드 아트 온라인은 정말로 꿈을 체현한 것이 될 예정이었다. 그것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개발자 스스로가 그 꿈을 부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갈까. 이대로 여기서 너와 둘이서 지내는 생활도 나쁘지 않지만, 이왕이면 네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거든. 맛있는 거 대접해줄 거지?」
「나 참, 그러니까 그런 부끄러운 말 하지 말아줄래? 여자를 희롱하면 끝이 안 좋을 거야.」
잠을 자려는 것처럼 몸을 옆으로 눕힌 용의 등에 타고 리즈에게 손을 뻗치면서 웃는다. 리즈는 여전히 내 농담에 초보자 같은 반응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쩐지 매우 기뻐져버린다. 아르고한테는 휘둘리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그 반동인지도 모르겠다. 리즈로서는 귀찮은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리즈와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즐겁다.
내가 놀리자 입술을 삐죽인 리즈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나는 그 손을 잡고 단숨에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때 마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백룡이 그 몸을 일으켰고,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리즈가 균형을 잃을 뻔한 것을 보고 황급히 끌어들였다. 기세가 지나친 나머지 리즈가 나한테 기대는 듯한 자세가 된 것은 결코 일부러가 아니다. 아니, 정말로. 부탁이니까 믿어줘.
그런 내 변명은 말로 표현되지 못했다. 백룡이 그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것이다. 지금까지 천천히 한 느릿느릿한 동작은 뭐였냐고 불평하고 싶어질 정도로 급상승을 개시했한 것이었다. 리즈는 자세를 고쳐 세울 틈도 없이 나에게 달라붙는 듯한 형태가 되었고, 나도 백룡한테서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느라 필사적이다. 역시 두 번이나 끈 없이 번지 점프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용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이었다. 아마 리즈도 비슷하겠지.
골치 아프게도 구덩이를 탈출하자 백룡의 거동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이미 완전히 우릴 떨어뜨리려고 의도한 움직임이다. 아무래도 게임적인 연출은 탈출한 시점에서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약속에서 벗어난 방식은 필요 없다고……!
「미안, 리즈! 뛸 거니까 꽉 잡아!」
「뭐? 꺄아!」
개발자에게 불평할 틈도 없다. 떨어뜨려져서 또 구덩이에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므로, 리즈에게 한 마디 한 다음 백룡의 등을 박차 단숨에 도약했다. 울상을 지으면서 내 목에 달라붙어 있는 리즈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일이 이해를 취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상공 높이 떠오른 백룡의 등에서 뛰어내려서 그런지 체공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리즈를 옆에 안고 받치면서 둘이서 빙글빙글 돌며 공중을 달린다. 눈 아래에는 아침해에 비추어진 일면의 은빛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빙설과 수정이 밝은 햇빛을 받으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광경은 환상적이었고, 뺨을 스치는 바람의 차가움도 기분 좋다.
리즈도 조금은 진정했는지 조심스럽게 눈을 떴지만, 곧바로 그 웅대한 자연의 광경에 환성을 질렀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감동이 마음에 가득 차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는 훌륭했다.
괴로운 일이나 슬픈 일이 많은 아인크라드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죄인 걸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배신일까.
그래도 지금만큼은 이 경치에 빠져들고 싶었다.
이것이 만들어진 광경이라 해도, 혹은 가짜 세계이기 때문에 더욱 그저 압도되는 절경 속에서 작은 나 자신을 느끼고 싶었다.
키리토 녀석, 조금은 기운 났으려나?
서로의 공통적 친구인 아스나에 대한 화제를 중심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예를 들면 내가 노점상을 하고 있었을 무렵에 아스나와 만난 경위를 이야기한다든가, 게임 초심자로서 이 세계에 서툴렀던 시절의 아스나에게 키리토가 결투를 신청한 것을 쓴웃음을 섞으면서 이야기해준다든가.
백룡의 둥지로부터 무사히 살아 돌아오고 나서 어딘지 모르게 낙담한 모습의 키리토가 걱정되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아는 유들유들한 키리토로 돌아와 있다. 포장마차에서 군것질을 즐기거나 한 것으로 기분이 나아진 걸까. 될 수 있으면 내가 배려해준 덕분에 기운 났다는 것으로 해주면 여자로서 기쁘거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때때로 곁눈질로 키리토의 상태를 보면서 돌아가는 길을 더듬자, 순식간에 리즈벳 무기점에 도착해버렸다.
「이제 와서지만 가게 이름에 내 이름을 쓴 건 어쩐지 낯간지럽네. 좀 더 수정하는 게 좋았으려나?」
「손님 입장에서는 알기 쉬워서 좋다고 보는데. 선전 효과도 높지 않을까?」
「아스나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 뭐, 애착도 있고 마음에 들었으니. 그럼 가게로 들어가자. 약속한 대로 커피를 대접해줄게.」
그렇게 타애 없는 대화를 즐기면서 가게 문을 열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에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속도로 그 인물은 나를 안아왔다. 밤색 머리카락이 충추고 부드러운 지체가 내 몸과 접촉한다.
혈맹 기사단 부단장인 《섬광》 아스나. 내 친구다.
「리즈, 걱정했어.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행선지를 모른다고 하고. 메시지도 안 되고, 맵 추적도 안 되고, 정말로 어디 갔던 거니……」
아스나는 눈초리에 눈물을 담고 있고,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크게 걱정을 끼쳐버리고 있던 것 같다.
나는 평상시 사냥하러 나온다고 해도 비교적 위험이 적은 필드 에리어 전문이기 때문에 미궁 구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연락할 수 없게 되는 사태가 없기 때문에 아스나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최악의 사태도 상상했겠지. 새파래진 얼굴로 흑철궁에도 가봤다고 고하는 아스나에게 미안한 심정으로 가득해졌다.
「미안해, 아스나. 퀘스트 아이템을 얻는데 시간이 걸려버려서. 설마 이틀이나 걸리는 큰일이 될 줄은 몰랐거든.」
잘못됐다면 평생 탈출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더 이상 아스나가 걱정하게 해서 좋을 게 없으니.
하지만 사실 뜻밖이긴 했지. 설마 크리스탈 무효화 공간에 갇힐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으니까. 필드 전문이라면 아무래도 함정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그 사태는 진짜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될 수 있으면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감각이다.
「아니, 리즈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퀘스트? 말해줬다면 나도 도왔을 텐데.」
「고마워. 하지만 일단 의지할 수 있는 호위를 데리고 갔거든. 나는 몬스터와 싸우진 않았어.」
「호위?」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전투 자체는 모두 키리토가 맡고 있었고, 내가 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지. 도움이 되기는 커녕 키리토를 방해했을 뿐이다. 한심하네.
「미안해. 리즈를 데리고 다닌 건 나야.」
그때 내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민 키리토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아스나에게 고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애초에 동행을 신청한 것은 나였고, 키리토는 몇 번이나 날 도와주었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말이다. 나야말로 키리토에게 면목 없는 상태였다.
「키리토? 왜 여기에, 맞다, 내가 소개했었지. 우우,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
「친구를 걱정해서 눈물이 나오는 건 한심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아스나의 상사도 부하도 아니니까 우는 얼굴을 봐도 공략파의 사기에도 영향이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아, 키리토. 그건 아니지 않니? 봐, 아스나도 가늘어진 눈을 하고 있고.
「키리토의 그런 점은 정말로 여전하구나. 전반은 그렇다 쳐도, 여자애가 울고 있는 것을 본 감상이 그런 건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리즈. 나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거야?」
「맞아. 굳이 말하자면 거기서 나한테 이야기를 돌린 거에서 이미 아웃이라고 생각해.」
너는 좀 더 여자 마음을 이해하라며 기가 막혀하는 투로 말해봤지만, 키리토는 놀라면서 당황할 뿐이다. 이래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겠네. 나한테는 그토록 농담을 해댈 수 있었으니까 플레이 보이 자질도 있을 것 같지만 말이지. 있잖아, 키리토. 아스나에게 말한 것도 《검은 검사》로서라면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아스나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르다고 봐. 아니꼬우니까 가르쳐주지는 않을 거지만.
뭐랄까, 이 녀석 언밸런스하네. 키리토의 사람됨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유들유들한 성격만이 원인이 아니고……. 뭐랄까, 덧없다고 할까? 그러한 어딘가 속세와 멀어져 있는 면을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잘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어쩐지 리즈도 리즈대로 어느새 키리토와 친해져 있네. 있잖아, 리즈. 이 경우 나는 어느 쪽을 질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뭐? 왜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건데?」
「왜냐니, 리즈는 키리토가 애칭으로 부르고 있잖아. 까다로운 키리토와 금방 친해진 리즈에게 질투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키리토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데 반 년 가까이 걸렸다고.」
「저기, 아스나 씨? 그때는 매우 폐를 끼쳤다고 할까,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엎드리듯이 어설프게 나온 키리토의 간원에도 아스나는 입술을 삐죽일 뿐. 두 사람이 친하다는 거에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새침해진 아스나에게 사과하는 키리토가 우스웠다. 둘 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공략파의 탑 플레이어이고, 《섬광》도 《검은 검사》도 이 아인크라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아이처럼 장난치고 있다. 내가 아니라도 그 차이에 웃고 싶어지겠지. 아스나도 역시 그 나이대의 여자애답구나. 지금의 아스나는 평상시보다 매력이 3할 늘어나 있다.
그런데 친구를 키리토에게 빼앗길 것 같은 상황인데, 여기서는 나도 키리토에게 질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까지 키리토와 친한 아스나를 치사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뭐야, 나도 아스나도 마찬가진가. 아스나와 키리토 둘 다에게 복잡한 심정을 품고 있었구나.
「그래서 말인데 키리토, 리즈한테 실례되는 짓은 하지 않았지?」
「아,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아서 모를지도 모르겠네. 오히려 실례되지 않은 행동이 적은 거 아닐까?」
「거기는 부정해 둘게……오히려 정색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보니까.」
이럴 경우 어설프게 변명하지 않는 키리토는 남자답다고 말해야 할지 조금 고민한다. 나도 키리토도 서로에게 실례되는 짓을 하고 있었고, 조금 말로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짓도 해버렸다. ……스킨십! 그건 스킨십이라고!
키리토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 키리토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남자애 얼굴이 눈에 뛰어들어오자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지만, 곧바로 어제밤에 내가 한 행동을 떠올리고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참아냈던 것이다. 키리토의 잠자는 얼굴이 너무나도 무방비했다는 것도 있어서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대로 어딘지 모르게 키리토의 잠자는 얼굴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해. 떠올리고 보니 얼굴이 멋대로 빨개져버린다. 얼굴과 귀뿐 아니라 온 몸이 열을 수반하면서 따끈따끈하고 있고, 심장이 격렬하게 맥박치면서 가슴을 단단히 조이고 있다.
으, 그래서 그때 키리토를 말리면서까지 떠올리지 않도록 했었는데.
「리즈? 왜 그래?」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공방으로 이동하지 않을래? 거기서 너희들한테 마실 거라도 준비할 테니까.」
「리즈, 그 전에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키리토.」
아스나 외에는 가게 안에 손님도 없고, 접객은 도우미 NPC에게 맡겨버리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퀘스트도 무사히 달성할 수 있었고, 축하와 사과도 겸해 아스나도 포함한 셋이서 브레이크 타임으로서 멋을 부려보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가게 앞에서 공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려고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키리토가 불러 세워서 방해받고 말았다.
「커피를 대접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잠깐 가야 할 곳이 생각났어. 미안하지만 나는 이만 실례할게.」
키리토가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 혹시 나와 아스나를 배려하고 있는 걸까?
「갑작스럽네. 급한 일이라면 말리지 않겠지만 주문한 검은 어떻게 할 거니? 아무래도 바로 완성시킬 수는 없어.」
키리토가 한 말은 유감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긴 해도 키리토가 바라는 검은 지금부터 공방에 틀어박혀서 해머나 용광로를 준비한 다음 대장장이 스킬을 기동해 손에 넣은 주괴를 수백 번 두드리지 않으면 완성시킬 수 없다. 금방 건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나도 그런 터무니없는 주문은 하지 않으니까 안심해. 검은 또 다음에 가지러 올게. 마음 같아서는 사흘 이내에는 완성시켜줬으면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사흘씩이나 들일 필요는 없어. 오늘 안에 완성시켜줄게.」
키리토의 검이니까 최우선으로 만들어줄게. 다행히 다른 일도 없으니.
「하지만 부탁한 마검급 검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장담은 할 수 없어. 그것만은 염두해 둬.」
「그때는 또 주괴를 얻으러 가면 돼. 너도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하게 해줘.」
키리토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상태로 말했다. 동요하지 않네. 고생한 거라면 나보다 훨씬 더했는데, 그런 것을 조금도 느껴지게 하지 않는 느긋한 태도다. 간이 큰 걸까, 아니면 나를 배려해서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걸까. ……그런 건 치사하잖아. 나는 배려를 받을 뿐이지 키리토에게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합이 팍팍 들어가지만 말야. ……뭐, 괜찮아. 실패를 전제로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는 내가 또 도와줄게. 동반할 대장장이가 필요하지?」
「그거 고맙군. 검은 완성하면 연락해줘. 나로서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30분 주면 속도를 내서 해치울 수 있긴 한데. 그 정도도 못 기다리는 거니?」
한숨을 섞으면서 말한다. 딱히 깊이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다. 다만 좀 더 키리토와 수다를 떨고 싶었기 때문에 아주 조금 불만이 입에서 나와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물었기 때문에 키리토가 계속한 말에 당혹해한 것이다.
「……바로 가지 않으면 결의가 무디어질 것 같거든. 너한테는 고마워하고 있어. 너한테 야단맞고 마침내 결심했어. ――그림록 녀석에게 사과하고 올까 해.」
그 순간 날카롭게 숨을 삼킨 것은 나였을까, 아니면 아스나였을까.
마비독을 주입한 특수 무기를 만드는 것을 키리토에게 요청받은 대장장이 그림록. 나는 그 사람을 모르지만 아스나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림록의 이름을 들은 순간에 보인 놀라움으로 봐서 그것은 일목요연했다. 그렇게 노골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의 인연이 키리토와 그림록, 그리고 아스나 사이에 있다. 아마 그다지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래. 주먹 한 방으로 용서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그만큼 말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쩌면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키리토는 웃고 있었다.
잔잔하다고 할까. 온화하고 부드러운 맑은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키리토의 덧없는 느낌의 정체는 이것인가? 이렇게 가슴이 단단히 조여지는 안타까움에 나는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헐떡인다. 키리토는 이런 얼굴도 하는 남자애였구나…….
검은 검사의 평판과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덧없는 모습은 내가 봐온 검사로서의 키리토가 아니다. 아마 이것이 저편의 세계의 모습을 현저하게 비춘 키리토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솔로로 플로어 보스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건 키리토가 말하면 농담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 그렇다면 다음은 좀 더 재미있는 농담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까. 그럼 리즈, 연락 잊지 말아줘.」
키리토는 그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린 뒤 한 손을 흔들면서 내 가게를 뒤로 했다.
키리토의 뒷모습이 안 보이게 되어도 나와 아스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담하고 있기만 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다. 이윽고 기합을 다시 넣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긴장으로 어딘지 모르게 몸이 굳어진 채로 아스나와 마주 보았다.
「아스나,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리즈?」
가만히 아스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고한다.
아스나의 표정에도 긴장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나한테서 눈을 피하지 않는다.
「아스나는 키리토와 그림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지? 난 그걸 알고 싶어.」
「……그걸 들어서 어쩔 생각인데?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바로 대답한 건 아스나에게 있어서 뜻밖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한 거에 아스나는 눈과 입으로 점 세 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아스나의 얼굴에 이런 때임에도 불구하고 내 목에서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스나가 뺨을 부풀리면서 항의해 오는 것을 미안 미안하고 달래면서 계속한다.
「우리 대장장이 사이에서는 뿌리 깊은 오컬트 신앙이 있어. 망치를 일정한 리듬으로 주괴에 내리치면 무기의 성공률이 올라간다든가, 무기 만들기에 임할 때의 기합이 결과를 좌우한다든가, 혹은 사용자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바라는 검을 만들어낼 수 있다든가.」
물론 그것들에 근거는 없다. 무기 종류와 금속의 랭크에 규정된 횟수만큼 주괴를 두드리는 것이 대장장이 스킬의 공정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고, 전문적인 기술은 애초에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개재할 여지가 없다. 수치가 전부인 게임 세계니까 오컬트적인 속설은 어디까지나 속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대개는 오로지 무심한 태도로 주괴를 두드리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의견도 있다. 모두가 마음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조금 전에 아스나를 생각하면서 친 금속에서는 몇 번이나 실패작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위안 이상의 효과는 없다.
그래도 그 말 하나 하나가 대장장이가 가지는 신념이자 신조이기 때문에 우습게 봐도 되는 것이 아니다. 대장장이들은 선두에 나서서 몬스터와 싸우는 전위직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선에서 싸우는 전사 이상으로 무기에 마음을 담는다. 그 검이, 창이, 도끼가, 우리가 만드는 무기가 이 세계를 끝내는 거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서,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을 괴물로부터 지킨다고 믿고서 염원을 담는다.
그래서 나는 아스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내가 모든 정성을 담아 검을 두드리기 위해서. 그 때문에 나는 키리토를 알고 싶다. 알고 마음을 담아 검을 만들고 싶다.
그저 무심하게 그 녀석을――키리토를 생각하면서.
「딱히 그림록과의 인연이라든가 그런 특별한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가능한 한 많이 그 녀석을, 키리토를 알고 싶어. 알고 검을 만들고 싶어. 단지 그뿐이야.」
「……키리토도 참 죄가 많구나.」
잠시 후에 아스나가 한 말은 그런 한숨 섞인 말이었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는 아스나에게 이끌리듯이 나도 파안한다.
정말로, 정말로 곤란하다. 친구가 반한 상대에게 자신도 반해 버린다든가 하는 건 드라마 속의 이야기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웬만한 드라마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상식적인 세계지만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역시 그 녀석은 인기가 많나 보네?」
「그런 편이지. 아르고 씨는 키리토를 공과 사 모두에서 받쳐주고 있는 느낌이고, 이전에 키리토가 도와줬다는 길드에 소속해 있는 여자애라든가, 조금 전에는 중층에서 용을 사역하는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고 들은 적도 있어. 원래 중층과 하층 플레이어에는 키리토 팬이 상당수 있다고 봐. ……뭐, 그쪽은 키리토의 팬이라기보다는 《시작의 검사》나 《검은 검사》의 팬이라는 느낌이니까 인기가 많다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인기 많은 거라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섬광》 님.」
애초에 공과 사 모두에서 지탱해준 건 아스나도 마찬가지잖아. 키리토도 너한테 고마워했다고. 아스나가 그림자에서든 표면에서든 감싸주었기 때문에 공략파에 있을 수 있었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진정한 의미로 솔로밖에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을 거라며 웃었거든.
거기다 팬이라든가 인기가 많다는 점에서는 아스나는 어떤 의미로 최고의 유명인 아니니? 용모 좋지, 성격 좋지, 검술 실력도 톱 클래스인 완벽 초인이니까. 내가 그렇게 놀리는 투로 말하자, 아스나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나와 키리토는 기대의 무게가 달라. 키리토는 우리 단장과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야. 《성기사》의 이름이 아인크라드에 얼마나 울려 퍼져 있는지는 알고 있지?」
「그야 《영웅》 히스클리프를 모르는 녀석은 없으니까. 그건 《검은 검사》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거기에 비하면 키리토의 정보는 매우 정밀도가 낮지 않니? 거기다 시작의 검사나 검은 검사의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있지만, 키리토의 캐릭터 이름은 거의 들은 적이 없어.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할까.」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한 이야기다. 아스나든 히스클리프든 RPG 같은 별명은 캐릭터 이름과 세트로 다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어느 한쪽만이 선행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키리토의 경우, 중층과 하층에는 별명만이 울려 퍼져 있고 키리토의 이름 그 자체는 들지 않는다. 본래 유명해져야 할 캐릭터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검은 검사로 대표되는 대명사만이 침투해 있다.
그런 내 의문에 아스나는 우리만의 비밀로 해 두자고 못을 박은 다음에 대답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는 키리토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리즈도 제1층에서의 PK 사건은 알고 있지?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야.」
그렇게 말한 아스나는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제1층 플로어 보스전은 지금부터 일 년하고 반 년 이상 전이 되어 있다. 그때의 정경을 떠올리고 있는지 아스나의 표정은 슬픔으로 물들고 있었다.
벌써 상당히 예전 일이 되었구나. 아스나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눈을 감고 천천히 이야기했다.
「제1층에서 키리토가 PK를 저지른 것은 착란한 플레이어로부터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공표된 사실이야. 하지만 사실은 달라. 사실은 그때 베타 테스터를 원망한 일반 플레이어가 토벌대 지도자를 PK하려고 했어. 키리토는 그 사람을 막으려 했지만 막지 못했어.」
「……그래서 막지 못해서 베었다는 거니?」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그때 플로어 보스와 대치하고 있어서 직접 보지 못했지만. 디어벨 씨――당시 토벌대 지도자였던 사람이 말한 바로는 자살이었던 것 같아. 스스로 키리토의 검에 뛰어들어서 라이프를 제로로 만들었대.」
「그게 무슨 소리니. 왜 그런, 마치 빗대서 말하는 것처럼――」
숨이 막히면서 쉰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스러질 정도였다. 뭐야, 왜 그 녀석만…….
의분을 안고 헐떡이듯이 가슴을 누르는 나를 바라보면서 아스나는 괴롭다는 듯이 속눈썹을 떨었다. 분명 아스나도 같은 생각을 한 거겠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들은 나조차도 이렇게나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플레이어를 죽이고 만 키리토는 어떤 심정으로 지금까지 싸워온 걸까. 싸움이란 이런 거란 말인가.
「디어벨 씨가 말하고 있었어. 그건 키리토를 부러워한 끝에 저지른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시작의 거리에서 영웅시되기 시작하고 있던 키리토를 알고, 그런 키리토가 눈부셔서 견딜 수 없어서. 그런데 왜 날 구해주지 않았냐며 한탄하고 슬퍼했어. 그래서 빛나는 존재에게 진흙을 묻히고 싶어서 그런 짓을 하고 싶어진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괴롭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어.」
「난 그런 거……몰라.」
나는 모른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버릴 정도로 절망한 심정도,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한 어둡게 침전된 마음도. 그리고 악의를 품고 누군가를 빠뜨리는 것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도 몰라. 디어벨 씨도 에길 씨도 《몰라도 돼》라고 말할 뿐이었어. 사실은 자살한 플레이어 본인만이 아는 건지도 모르고, 그것을 곡해해서 도리어 원한을 품은 거에 지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니까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말라고. ……우린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건지도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한숨을 내쉰다. 우리가 여자라서 이해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어린애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걸까.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키리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건?」
「키리토는 오렌지 플레이어가 된 자신에게 베타 테스터와 일반 플레이어 양쪽 모두의 분노를 모으라고 말했어. 당시는 베타 테스터에게 일반 플레이어를 버린 비겁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잖아? 베타 테스터를 배신자라고 매도하고 있었던 일반 플레이어가 반대로 베타 테스터를 배신하고 죽이려 했다는 게 모두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것도 플로어 보스전이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말해도 대혼란이네. 누구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애초에 나 이외의 누군가를 믿어도 되는 건지, 모두가 의심에 차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일반 플레이어는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해자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껏 베타 테스터를 비난할 수 있었다. 아마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강하게 책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은 좋아하지 않았다. 악담을 하면 그만큼 내 안에 기분 나쁜 덩어리가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분노와 불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플레이어로부터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다.
시작의 거리에 남은 플레이어는 마음껏 베타 테스터를 비난하는 것으로 나날의 불만과 공포를 얼버무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도식이 무너졌다면 남는 것은 아마 혼란뿐이겠지.
「키리토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래서 자신에게 분노나 미움을 부딪히게 하는 것으로 살의를 가진 《동료 살해자》에 대한 사실을 숨기려고 했어. 플레이어들이 하나가 되어 게임 클리어를 목표로 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안타까운 진실이었다.
지금은 베타 테스터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어 있지만, 그 당시의 베타 테스터에 대한 마음의 거리는 상당했다. 키리토――《시작의 검사》의 이름이 너무나 특별해지면서 베타 테스터와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카야바의 아바타에게 돌격한 것과 그 후에 한 연설, 모든 콜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 것 등등. 그 행동 하나 하나가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바로 그 본인이 베타 테스터였다는 인식이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비겁자라고 매도한 베타 테스터와 은인인 시작의 검사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시작의 검사의 이름이 혼자 걷기 시작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 모두가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었으니까. 시작의 검사의 이름은 일종의 신앙 대상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키리토가 자신을 죽이도록 한 플레이어는 그렇게 찬란한 빛남을 견딜 수 없었다는 걸까. 진흙을 내던지고 싶어질 정도로 미워한, 아니 부러워해버렸다는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나――너무나 제멋대로잖아……!
「우린 키리토의 말을 받아들였어. 물론 키리토 한 사람을 악역으로 만드는 것을 수긍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키리토가 제안한 것 이상으로 신속하게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어. 거기다 키리토의 커서가 오렌지가 되어버린 것은 숨길 수 없었으니까, 시급히 키리토를 지키기 위한 수단을 쓸 필요도 있었어. 그것이 키리토가 보여준 자기 희생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게 키리토의 PK는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사태이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정보를 공표한 것과, 공략파가 그 별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구나. 적어도 키리토의 이름만이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혹시 《시작의 검사》를 《검은 검사》라는 이름으로 덧씌우려 하고 있었던 것도?」
진실을 아는 당시 공략파 멤버들은 PK를 저지르고 《동료 살해자》란 오명을 쓴 《시작의 검사》와 《키리토》를 떼어내려고 했다는 얘긴가?
「응. 하지만 그 후 키리토가 솔로로 활약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기대도 어긋나버렸지만 말야. 거기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혼자서 모든 걸 뿌리치고 계속 싸우려고 하는 키리토에게는 우리도 뭐라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려서……. 그래서 적어도 키리토에게 직접 향하는 악의만이라도 줄이려고 했어. 분명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테니까. ……한심하지만 우린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어. 이렇게 말하는 건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지 않지만, 우리도 키리토만 생각하고 있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체념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아스나의 표정은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공략파는 모두가 검은 검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지. 지금까지는 그저 두려워하거나 미워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근원에는 진실을 아는 공략파 사람들의 공작이 있었던 거구나. 무책임한 소문이나 근거가 없는 비방 중상이 만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키리토의 정보를 경솔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양성했고, 그 흔적이 오늘의 키리토를 둘러싸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키리토만이 몇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그렇게 이름을 덧씌워온 부산물 같은 거였구나. 일상의 사소한 화제에도 키리토의 캐릭터 이름이 올라오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면 에피소드의 수만큼 별명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키리토의 목적을 눈치챘을 때 키리토를 매우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누군가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해버릴 것 같은 그런 키리토의 마음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이 세계에 갇히고 나서 긴 시간이 지난 지금이니까 지키고 싶은 사람이나 살리고 싶은 사람도 생겼지만, 그 당시는 주위 플레이어들은 모두 완전히 타인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런데 키리토는 일시적으로 함께 싸운 우리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이인 베타 테스터와 일반 플레이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현실에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
……그렇겠지.
아스나가 한 말은 나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제 일도 그렇다. 백룡의 둥지에 떨어졌을 때, 키리토는 무엇보다도 나를 최우선으로 삼고 행동했다. 마지막에는 나를 감싸면서 지면에 부딪혔다. 다행히 HP가 제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키리토도 결코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를 구하고, 그 몸을 희생했다. ……극한의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기 목숨을 포기해버릴 수 있는 인간성. 그것은 역시 뒤틀려 있어서 어쩐지 두렵다고 느껴진다.
무섭다라. 아스나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알 것 같다. 무섭고 무서워서……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강렬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불안해져버리는. 그런 덧없음이 키리토에게는 확실하게 있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악인이구나.
「아스나, 혈맹 기사단에 돌아갈 때는 조심해. 지금 넌 완전히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흥이다. 지금의 너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리즈야말로 그런 얼굴을 하고 손님 앞에 서면 안 돼. 분명 오해받을 테니까.」
「미안하게 됐네. 나는 이대로 공방에 틀어박혀서 검을 만들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느낌이 들거든.」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응원할게, 리즈.」
「안심해. 나도 아스나를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둘이서 웃었다.
아스나와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때 《황금사과》라는 이름을 지닌 길드가 있었다.
단장은 리더십이 흘러넘치는 여검사 그리셀다가 맡고, 부단장은 그리셀다의 남편이기도 한 그림록이 맡아 헌신적으로 그녀를 지탱했다. 중층에 위치하는 길드 중에서도 빠르게 실력을 늘리면서 공략파에도 그 높은 실력이 전해질 만한 강함을 자랑하게 되어 갔다. 그렇게 해서 공략파의 일원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가 들리게 되었을 무렵, 황금사과는 갑작스럽게 해산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해산극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소문이 퍼져 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 아인크라드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다. 아마 황금사과도 멤버 중 누군가가 전사했거나 내분을 일으켜서 해산한 거라는 결론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고, 황금사과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져 갔다. 사실 그들은 리더인 그리셀다를 잃은 것으로 길드를 해산했기 때문에 아무 근거도 없는 소문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나고 한때의 황금사과의 멤버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현재 성룡 연합의 벽전사이자 전위 대장의 간부로서 활약하는 슈미트도 한때 황금사과의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슈미트에게 한 가지 정보가 들어온 것으로 황금사과의 얼어붙은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정보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검은 검사가 성룡 연합에게 양도한 레어 아이템――민첩 수치를 20 상승시키는 반지였다.
길드 《황금사과》가 해산된 계기는 길드장인 그리셀다의 사망이지만, 해산하기 직전 그들은 엉뚱한 일로 입수한 레어 아이템인 반지를 둘러싸고 의견을 대립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반지를 누군가 한 사람이 장비하는 것으로 전력 강화를 꾀할 것인가, 아니면 반지를 매각하는 것으로 길드 자금을 저축해서 길드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자금을 분배하거나 다른 장비품을 준비할 것인가 등등.
최종적으로는 반지를 매각하기로 정해졌다고 하지만 결코 만장일치였던 것은 아니고 끝까지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일단 의견 조정을 끝낸 그들은 반지를 단장인 그리셀다에게 맡겼고, 다음날 그리셀다 본인이 반지를 매각하러 가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다음날, 그리셀다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멤버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숙소의 방도 문이 잠긴 채로 시간만이 시시각각 지나갔다. 언젠가 벌어졌던 사건을 방불케 하는 흐름이다. 실제로 길드 멤버들도 지금으로부터 일 년 이상 전에 플레이어들을 흔들리게 한 밀실 PK 사건에 생각이 미쳤고,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고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있던 부단장이자 그리셀다의 남편인 그림록이 대신해서 흑철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의 리더인 그리셀다의 사망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었다.
흑철궁의 생명의 비석에 새겨진 문언은 《제19층 십자의 언덕에서 HP 완전 상실》.
조금 불가해하기는 하다. 다음날에 반지를 매각하는 것을 앞둔 그리셀다가 야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숙소를 빠져나갔다는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이야기고, 이전의 밀실 PK 사건에서의 수법도 있을 수 않다. 여하튼 황금사과 멤버들은 상주하는 숙소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리더 크리스탈을 악용해서 방에 침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금사과 멤버들도 그리셀다의 죽음을 한탄하고 슬퍼하는 한편, 너무나 앞뒤가 안 맞는 상황과 아로새겨진 수수께끼에 망연할 뿐이었다. 결국 그리셀다의 남편이자 황금사과의 부단장을 맡고 있던 그림록이 아내의 죽음에 의기소침해서 모험업으로부터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황금사과는 해산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셀다의 불가해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내를 조용히 잠들게 해주고 싶다고 하는 그림록을 존중해서 공표되지 않았다.
이상이 작년 가을에 일어난 황금사과를 덮친 비극이다.
확실히 참혹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면 애초에 나한테까지 이야기가 전해질 일도 없었다. 내가 성룡 연합에게 건네준 그 반지가 황금사과에서 의견 대립의 원인이 된 반지와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면.
황금사과 안에서도 특히 그리셀다를 존경하고 있던 여성 플레이어 요루코, 그리고 요루코의 동반자인 카인즈와 동반하는 형태로 슈미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지금부터 약 2개월 전, 드물게 내가 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때였다. 정확히는 장비를 정비하기 위해 미궁 구역으로부터 마을로 돌아와 있었더니 아스나와 우연히 만났고, 매번 플로어 보스 공략 회의에서 폐를 끼치고 있는 거에 대한 사죄도 담아서 식사 제의를 했다는 것이 상세한 사정이다.
그 자리에서 전 황금사과 멤버가 말을 걸었고, 황금사과가 해산된 경위를 들은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명쾌했다. 그리셀다의 죽음의 진상과 그 해명이다. 길드 안에서 마지막에 의견 다툼의 원인이 된 레어 아이템인 반지와 같은 것을 한때 내가 소지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성룡 연합에 소속된 슈미트를 경유해서 들은 요루코는, 내가 그리셀다에 관한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다.
――혹은 내가 그리셀다의 최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내가 작년 연말에 성룡 연합에게 양도한 반지는 그리셀다한테서 샀거나 강탈한 것이 아닌가 하고.
물론 그런 것을 직접 말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요루코와 카인즈의 눈에서는 명백히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진심으로 나를 그리셀다를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조금이나마 발견된 진상 해명에 관한 실마리에 필사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겠지. 그리셀다의 의문 투성이인 죽음. 그리고 길드 해산으로부터 긴 세월이 지났지만, 그리셀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속 끌어온 피로가 요루코와 카인즈의 얼굴에 현저한 그림자가 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공략파를 지탱하는 전위 전사로서 나와 많이 안면이 있던 슈미트는 비교적 냉정했다. 두 사람에 비해 명백히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희박한 태도였던 것이다.
나 자신이 PK를 저지른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심받기 쉬운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내 옆에는 잠자코 듣고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여걸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은근히 의심받고 있는 것을 눈치챘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 영롱한 미모를 흐리게 하면서 험악한 시선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그 변화에 옆에 앉아 있던 내가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이거 화나 있다. 확실히 화나 있다.
아니, 물론 저들의 혐의 모두가 오해이지만 말이지. 내가 가지고 있던 반지와 그리셀다가 소지하고 있던 반지는 종류는 같아도 별개의 물건이고. 아무리 레어 아이템이라고 해도 이 세계에 단 한 개밖에 없는 비보인 것도 아니다. 내가 입수한 반지도 날마다 사냥하던 중에 드랍된 거니까 그리셀다가 마지막에 소지하고 있던 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나누어서 그런 것을 전해봐도 증거가 없는 이상 아무런 설득력을 갖출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사람들은 매우 사람이 좋은 건지 내가 만약을 위해 한 말만으로 쉽게 믿어버렸다. 그래도 괜찮은 거냐며 걱정하게 될 정도다.
이상하게 여겨서 왜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거냐고 되묻자, 그들은 미리 슈미트한테서 의미 없는 힐문이라고 언질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슈미트는 황금사과가 해산한 뒤 성룡 연합에 입단하고 거기서 두각을 드러내 온 사내다. 당연히 초기부터 플로어 보스전에 참가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내 PK를 직접 본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성룡 연합과 나는 공략에 관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을 뿐이고, 내 정보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당시부터 공략광이라고 야유를 받고 있던 내 생활을 알고 있다면 문제의 황금사과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연스럽겠지. 애초에 레어 아이템을 싼 가격으로 공략파에게 뿌리고 있는 내가 공략파도 아니었던 황금사과, 그리고 그리셀다에게 억지스러운 짓을 하면서까지 아이템을 강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곧바로 생각이 미치기 마련이다. 그 정도 레어 아이템으로 내 식지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사족이려나.
그렇게 길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사건에 관해서 나는 거의 방관자였다. 왜냐면 그들에게 의심받은 본인인 내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지만, 공략파가 자랑하는 미모의 여검사님께서 기합을 단단히 넣고 사건 해결에 나섰기 때문이다. 아니, 나섰다고 하기도 그렇군. 아스나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나 싶더니 험악한 얼굴을 한 채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즉 「코리더 크리스탈로 예외적으로 새길 수 있는 《자기 방》은 어쩌면 부부가 공유하는 형태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이전의 수면 PK를 가능하게 한 수법의 아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방법이 가능한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고서라도, 그 가설을 제시받은 전 황금사과 멤버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것도 그렇겠지. 여하튼 아스나는 《그리셀다의 남편인 그림록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이때의 내막적인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아스나의 《코리더 크리스탈의 악용 수법 부부 버전》 가설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며 내가 아르고한테서 확인하고 오겠다고 제안하자, 아스나 녀석은 「절대 안 돼」라고 상냥한 태도로 반대했다. ……그때 아스나한테서는 유무를 말하게 하지 않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아스나의 이상한 박력에 압도되면서 아르고라면 결혼 시스템으로 일시적으로 결혼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테고, 곧바로 이혼할 수 있으니까 문제 없을 거라고 주장해봤지만, 아스나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면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아스나 말로는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야.」라는 것.
그야 나도 아무리 의사적인 결혼에 지나지 않는 게임 시스템이라고 해도 이혼을 전제로 한 결혼은 여성에게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수단을 명쾌하게 승낙해줄 상대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워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보는데.
옥신각신한 끝에 최종적으로 요루코와 카인즈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검증을 해보자는 결론으로 진정되었다. 내가 내막적인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검증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이혼을 전제로 한 이 결혼이 지금에 도달할 때까지 파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래 요루코와 카인즈는 황금사과가 해산된 후 쭉 한 팀으로 행동해왔기 때문에, 반쯤 연인 같은 사이라고 슈미트가 귀띔해주었다. 의외로 좋은 타이밍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사태는 진전을 보였다. 결국 아스나가 내세운 가설이 그리셀다 사망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최대 요인이었고, 그리셀다의 죽음에는 확실히 그림록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셀다를 직접 죽인 것은 그림록한테 의뢰를 받은 래핑 코핀이었지만, 그림록이 그 암살을 도왔다는 것은 본인이 자백한 것이다. 살해한 장소가 숙소의 독실이 아니라 제19층 십자의 언덕이었던 것은 아마 래핑 코핀의 연출이겠지. 그놈들은 묘하게 자기 과시욕이 강한 면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인크라드를 석권할 정도로 레드 길드의 악명을 떨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록은 처음부터 그리셀다를 죽게 해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순순히 자백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셀다와 그림록은 현실 세계에서도 부부였다고 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남편인 그림록이 가정의 중심으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그리셀다는 그런 남편을 정성껏 지탱해주는 좋은 아내였다. 그림록이 앞으로 나오고, 그리셀다가 뒤를 받친다. 그것이 그들의 부부 생활의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목숨이 위험해진 거에 겁을 먹은 그림록과 현실 세계의 소극적인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활기차게 살기 시작한 그리셀다 사이에 메우기 어려운 틈새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림록은 날마다 변해가는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전의 아내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걸 위한 수단이 아내를 살해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쳤고, 이미 수단과 목적이 파탄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림록은 어딘가 제정신을 잃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림록이 말하는 것처럼 죽이고 싶어질 정도로 미워해버리는 사랑을 품은 적은 없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록이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스나도 마찬가지겠지. 오히려 이 세계를 열심히 살면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열성적인 활동을 선택한 그리셀다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림록의 망념을 그리셀다에 대한 소유욕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셀다와 같은 여성으로서 제멋대로인 그림록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스나가 들이댄 말에 의기소침해진 그림록을 마지막으로 황금사과 멤버들을 오랫동안 묶어온 사건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말한 전 황금사과 멤버를 놔두고 래핑 코핀을 토벌하기 위한 검을 그림록으로 하여금 만들도록 한 나는 도저히 방관자라고 할 수 없겠지. 비겁자, 혹은 외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림록의 승낙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전 황금사과 멤버들이 용케도 내 제안을 받아들여줬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말을 들어주었다고 하기보다는 그림록 본인의 결의를 존중한 거겠지만.
이것이 내 속죄라고 말한 그림록을 보고 슈미트는 말 없이 나한테 협력하는 것을 선택했고, 요루코와 카인즈는 검을 만들 재료 모으기에 분주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때의 동료인 그림록에 대한 최소한의 전별이겠지.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언젠가 그들이 다시 서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광기에 내몰려 참혹한 사건을 일으킨 그림록이기 때문에, 그리셀다가 죽은 땅인 제19층 십자의 언덕에 자리잡은 거대한 묘비 오브젝트 앞에 자주 다니고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묘비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시 서 있는 그림록의 모습을 보고 발이 멈춘다. 지원직인 대장장이 플레이어라는 직함과는 정반대로, 그림록은 장신에다 적당히 단련된 체구를 하고 있어서 호리호리한 체격이면서도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그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 성실한 생활을 하고, 몸과 마음 모두 충실한 것을 충분히 엿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림록은 현실 세계와 아인크라드에서의 자기 입장의 낙차에 한층 더 울적함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방문객을 알아챈 그림록이 한 번 돌아보고 안경 안쪽의 이지적인 눈동자에 내 모습을 비춘다. 그림록은 눈을 약간 크게 떠서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곧바로 평정을 되찾고 묘비로 시선을 되돌렸다. 한동안 침묵한 뒤 그림록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두 번 다시 자넬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서로를 위해서라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얼굴을 마주쳐도 서로 아픔과 후회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과연 나의 본심이었던 것일까. 혹은 죄책감에서 나오는 도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록 옆까지 나아간 뒤 묘 앞에 꽃을 놓고 살짝 손을 모았다. 나도 그림록도 서로 눈을 돌리거나 하지 않는다. 묘비를 응시하는 시선은 그대로 한 채 목소리만이 조용히 공기를 진동시키면서 교차해 나간다.
「그럼 왜지?」
「당신한테 사과하려고. 그리고 이 검을 돌려주려고.」
검 한 자루와 투척용 픽. 오브젝트화된 그것의 소유권을 방폐하고 꽃을 놓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손놀림으로 묘 앞에 두었다. 나, 그리고 그림록에게 있어서 죄의 상징이다. 플레이어끼리 죽고 죽이는 상황에 투입하기 위해 준비한 무기. 대장장이에게 있어서 터부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내가 요청하고, 그림록이 응한 물건들이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하나는 그림록에게 사과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묘 앞에 꽃을 더하는 것. ……꽃에 걸맞는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리셀다 씨, 당신 남편인 그림록 씨 덕분에 아인크라드에 사는 모든 플레이어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던 살인 길드 《래핑 코핀》을 괴멸로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날은 아직 멀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더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됐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부군의 헌신과 각오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고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검은 훈계할 생각으로 쭉 아이템 스토리지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자기 만족이라 해도 스스로 플레이어끼리의 투쟁에 몸을 던진 나에게 이것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내 제멋대로인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은 그리셀다에게 하는 보고는 내 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림록이 힘을 써준 덕분에 래핑 코핀 토벌은 성공했다. 그것에 거짓은 없다.
다만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져 가는 내 말을 그림록은 분명 환영하고 있지 않겠지. 오히려 눈썹을 찡그리면서 언짢게 여기고 있는 거 아닐까.
「고마움도 칭찬도 필요 없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검을 만들었어. 그것은 내 허물이지, 자네가 마음에 둘 일이 아니야.」
잠시 후에 그림록이 한 말은 그런 말이었다. 격앙하는 것도 아니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확실히 그 말에는 깊은 정감이 담겨 있었다.
이것도 사람에게 씌인 악령이 떨어져 나갔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림록이 한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죽였다고 말한 남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음성을 하고 있었다. 광기어린 열기에 들뜨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자신의 나약함을 비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그림록한테서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싹을 느끼게 하는 강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가짜밖에 없어. 있을 수 없는 괴물, 비일상적인 검, 유사품인 신체. 그러니까 적어도 마음만은 진짜이길 바라면서 믿었어. 믿었기 때문에 변해가는 아내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녀까지 가짜가 되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무서웠어. ……그것은 추억 속의 아내만 쫓고 있었던 내 약함이야. 나는 내 추억 속의 아내의 모습을 영원하게 하려고 한 나머지, 아내의 변화를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마땅히 추억 속의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고 단정해버렸던 거야. 아스나 양이라고 했나. 자네 여자친구가 말한 대로야. 나는 아내와 나 자신의 애정을 믿지 못하고 아내에 대한 소유욕에 자극을 받은 채로 그런 어리석은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으니까.」
그림록의 독백에 귀를 살짝 기울인다. 한때 이 세계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는 한 사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위로 같은 건 필요 없겠지. ……아스나가 내 연인 취급을 받고 있지만 부정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자네는 뒤를 보지 말고 앞을 향하도록 하게. 과거만을 돌아보기에는 자넨 아직 너무 젊어. 자신의 약함을 이유로 지켜야 할 것을 착각하거나 해서는 안 돼. 소중한 것을――잃어서는 안 돼.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돼. 그것이 반드시 자네를 구하게 될 거야.」
――자네는 나처럼 되지 말게.
만감을 담아서 한 그 말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괴로움과 회한이 담겨져 있을까.
그리고 그 조언에 솔직하게 수긍이 가지 않는 내 약함과 미혹은 얼마나 죄 많고 한심한 것이란 말인가.
「키리토 군, 나는 자넬 원망하지 않아. 부디 그것만은 기억해주게.」
「……고맙습니다. 그림록 씨.」
그것은 이 세계를 사는 검사 키리토로서만이 아니라 지금은 머나먼 키리가야 카즈토로서 진심을 담은 인사이기도 했다.
묘비에 시선을 향하고 있는 그림록에게 고개를 깊이 숙인 뒤 죽은 이의 잠을 장식하기에 걸맞는 정적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
내구치 한계를 맞이한 검과 꽃이 뒤에서 폴리곤 크리스탈이 되어 자연 소멸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십자 언덕을 뒤로 했다.
「완성한 검 이름은 《다크 리펄서》. 어둠을 없애는 칼날이라고 할까. ――너한테는 딱 맞을지도 모르겠어.」
다시 방문한 리즈벳 무기점. 그 안쪽 공방에서 나는 리즈와 마주 보고 있다. 내가 리즈한테서 연락을 받고 가게를 방문했을 때는 아스나는 이미 혈맹 기사단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나와 리즈 둘뿐이다.
「검의 완성도 자체는 어땠어?」
「만전이지. 네가 애용하는 마검 클래스에도 지지 않아!」
내 물음에 리즈는 만면의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슴에 안은 검 한 자루에 시선을 내리고 사랑스럽다는 손놀림으로 살짝 내 앞에 내민다.
……무겁다.
받은 검으로부터 손에 전해지는 감촉에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검이라는 실감이 가슴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칼집에서 칼을 뽑아내고 날뛰는 마음을 달래듯이 차분히 칼날에 시선을 향한다.
비취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아름다우면서도 시원한 인상을 지닌 검이었다. 주괴의 성질을 계승하고 있는지 칼날 그 자체가 투명해져 있는 것 같다. 칼날 그 자체는 얇고, 한손 직검 카테고리로서는 약간 가녀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우아한 외형과는 달리 칼날의 훌륭한 광택은 충분히 전투에서 활약해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강함을 숨기고 있다.
아무래도 리즈는 훌륭한 검을 만들어낸 것 같다.
나도 리즈에게 이끌리듯이 표정에 미소가 떠올리고 기쁨을 드러내면서 리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거기서 리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이 검을 건네주기 전에 두 가지 약속해줬으면 해. 만약 약속해준다면 그 검은 공짜로 해줄게.」
리즈는 매우 진지한 눈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마지막만은 농담이라는 투로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말과는 정반대로 가슴팍에 얹은 리즈의 주먹은 불안과 긴장 때문인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적당히 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라. 리즈는 의외로 욕심쟁이구나. ……어려운 게 아니라면 괜찮지만.」
「흐흥, 여자애는 모두 욕심이 많아. 몰랐어?」
「견문이 적어서 몰랐다고 말하고 싶지만, 짐작이 가는 마디는 있군.」
주로 쥐라든가, 쥐라든가, 쥐라든가라고 말하면 역시 화를 낼 것 같으니 결코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검의 대금이 아까운 건 아니지만 다름아닌 리즈가 부탁한 거니까 일단 말해봐.」
「고마워.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할게. 키리토, 날 네 전속 대장장이로 삼아줘.」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리즈가 한 말은 나에게 큰 충격과 동요를 주었고, 동시에 가슴을 어지럽히는 날카로운 아픔도 가져왔다. 뜻밖이라고 한다면 리즈의 그 한 마디야말로 뜻밖이었다. 리즈는 말문이 막힌 나를 보고 내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는지,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지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으면서도 다부지게 서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속 대장장이.
그 이름대로 특정 플레이어의 전속으로서 무기나 방어구 작성이나 정비를 담당하면서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모두 지탱해주는 역할을 가리킨다. 물론 정식적 시스템 명칭은 아니고 편의적으로 이름이 붙여진 호칭이고, 그 계약 방법도 호들갑스러운 계약서를 주고 받는 것도 아니며, 대개는 언약을 맺은 뒤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끼리의 특별한 유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래서 전속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그 외의 많은 지인이나 친구가 아니라 특별한 친구로서 믿음으로 서로 이어진 깊은 관계라는 것을 서로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직공 플레이어가 말하는 그것은 이성 사이에서 은근히 고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아인크라드에 실장되어 있는 결혼 시스템은 서로 아이템 스토리지 공유화나 스테이터스, 스킬의 자유 열람이 가능하게 되는 등 개인 정보가 누설되기 때문에, 플레이어에게 불이익이 너무 크다. 그 때문에 결혼을 바라지 않는 부부 관계의 다운 그레이드판으로서 《전속》이라는 직함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아르고의 분석이었다.
리즈가 한 말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을 지탱하게 해주세요.》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인 대사였던 것이다.
설마 직공 플레이어인 리즈가 남녀 사이에 주고 받는 전속 대장장이 계약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겠지. 여하튼 리즈는 다부지게 행동하려 하고 있어도 한층열기를 띠고 물기를 띤 눈동자가 끊임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상기한 뺨의 선명한 홍조는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리즈를 보고 《친구로서 전속 계약을 맺읍시다.》라는 의미로 착각하는 플레이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마음을 부딪혀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말해 두지만 리즈는 좋아한다. 그것은 틀림없다. 대쪽 같은 시원시원한 성격도, 언동의 이모저모에 배이는 치기와 통찰의 언밸런스한 낙차도 리즈의 매력 중 하나다. 좋은지 싫은지를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좋다를 선택할 정도로 나는 리즈를 좋게 생각하고 있고, 이끌리기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남녀 사이의 정에 근거하느냐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마음을 연모라고 하기에는 나는 리즈와 보낸 시간이 너무 짧다. 나는 연애에 대해 한눈에 반한다는 현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일이 현실에 일어날 리가 없다고 믿고 있는 측의 인간이니까.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리즈가 이 이틀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때의 나는 혼란의 극치에 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하는 거라도 정도가 있고. 이것으로 냉정 침착하게 대처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내 대응 가능한 범위로는 이미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센스 있는 대답을 도저히 떠올리지 못하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해도 그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에 입을 다물어버리는 내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지, 아니면 긴 침묵에 견딜 수 없게 되었는지 리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치사한 말을 해버렸네. 네가 내 고백에 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리즈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대답할 것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체념이 배인 이해였다. 그것도 또 내 혼란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어서, 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침묵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었다.
리즈는 한 번 심호흡을 하듯이 크게 가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명료한 어조로 말을 계속한다.
「아스나한테서 들었어. 넌 이 세계에서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면서. PK를 저지른 죄를 현실 세계에서 청산할 때까지는 누군가의 행복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확실히 말했다.
황금사과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해결한 뒤, 그림록의 비뚤어져버린 애정을 안 나와 아스나 사이에서 문득 화제에 오른 것이었다. 아스나는 나한테 「게임 안이라고 하면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겠니?」라고 물었던 것이다. 결혼 시스템의 사양을 악용한 수법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스나는 공략파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인 한편 근본은 연애나 결혼을 동경하는 당연한 감성을 가진 소녀라는 것을 재차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로그인하기 이전의 나라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내가 누군가와 결혼해서 깊은 사이가 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이 게임에 사로잡히기 전의 나는 결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누군가와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무렵의 나라면 게임상이니까라며 결론을 짓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데스 게임이 되고, PK를 저질러서 오렌지가 된 것으로 강렬하게 현실을 의식하게 된 내가 모든 것을 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현실 세계로 돌아갔을 때에 죄로 거론될 가능성이 있는데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모든 것을 말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들은 아스나는 쓸쓸한 듯이, 그리고 마음 아프다는 듯이 수긍했다.
「아스나 녀석, 너한테 그런 것까지 이야기한 거냐……」
무심코 얼굴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실 입막음을 한 것도 아니지만, 너무 경솔하게 입에 담기를 바라지 않은 화제였다. 내 적나라한 본심이 내 입 이외에서 새어나오는 건 사양하고 싶다.
「아스나를 탓하지 말아줘. 내가 억지로 말해서 들은 거니까.」
「탓하지는 않을 거지만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도록 입막음을 할 필요성은 생각하고 있던 참이야.」
어깨를 푹 떨군 나한테 리즈도 미안함이 담긴 쓴웃음을 띄우며 손을 모으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라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고백에 대한 대답은 필요 없어. 그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플레이어로서, 게임 클리어를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키리토의 친구로서 가혹한 전장으로 향해 가는 네 장비를 돌보게 해줬으면 해. 마스터 스미스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최우선으로 정비해줄게. 아, 맞다. 미궁 구역에 틀어박히기만 하는 네 생활 파탄상도 듣고 있으니 매일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내 개인 정보가 완전히 누설되고 있군. 역시 아스나하고는 한 번 서로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큼 아스나한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거야.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리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쾌활하게 웃었다. 그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명랑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리즈는 강하구나. 그에 비하면 난 연약하기 그지 없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리즈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했으니 그에 응해서 똑바로 마주 봐야 한다.
「난 아무 보답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게 해줘. 고마워, 리즈. 전속 대장장이의 건은 잘 부탁할게.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라~져. 큰 배에 탄 느낌으로 맡겨두라고!」
공략파의 한 플레이어로서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전속으로 무기를 돌봐주는 놀라운 솜씨의 대장장이라는 것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특히 나처럼 무기 소모가 심해서 빈번한 정비를 필요로 하는 타입에게는 최우선으로 무기를 정비해주는 대장장이의 존재는 누구와도 대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다 솔로 플레이어로서 길드에 소속된 대장장이 플레이어에게 의지할 수 없는 몸인 만큼, 솔직히 리즈의 제안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운 것이다.
「그럼 두 번째 부탁을 들려줄래? 웬만한 거라면 들어줄 용의가 있어.」
「오, 말했겠다.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연극에 어울려줄래?」
죄책감이 그대로 입으로 나온 나에게 리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만면의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너무 성급했나 하고 후회하기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것은 리즈의 제안이 아까 거와는 다른 의미로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연극?」
「그래, 연극이야. 우리에게 익숙한 말을 하는 거라면 롤 플레이지. 등장 인물은 나와 너 둘뿐. 역할은……그래, 네가 《기사님》이고 내가 《공주님》일까?」
「아니, 거기서 나한테 의문형으로 말해도 말이지.」
리즈의 두 번째 부탁이 의도하는 것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런 나한테 리즈는 집게 손가락을 세우고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우린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괴로운 일만 겪었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만 만들 수 있는 추억이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니? 모처럼 검의 세계니까 거기에 어울리는 놀이 한두 가지를 즐겨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는데.」
「놀이라니……리즈.」
「불성실하다고 화난 거니? 하지만 말야, 너를 포함한 공략파에게는 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처럼 최전선에 참가하지 않는 플레이어의 동기 부여는 그렇게 놀고 싶은 마음으로 유지되고 있는 부분도 있어. 내일이 안 보이는 이 세계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는 가운데 찾아낸 중요한 지혜인걸. 그런 사람들을 키리토는 바보 취급하거나 경멸할 수 있어?」
기가 막혀하는 표정을 띄운 나를 보고 리즈는 비난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리즈에게 나를 책망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다. 리즈의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망양한 색조를 하고 있고, 그 시선은 내가 아니고 그녀 자신, 혹은 이 세계의 플레이어가 겹쳐서 쌓아온 노고의 과거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살고 있다. 그런 건 지적할 것도 없이 이해하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정의가 아니다. 어느새 나도 공략파의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략을 서두른 나머지 그 이외를 잡무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라버리게 되어 있었던 걸까. ……여유가 없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겠군.
「……나도 매우 초조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알았어. 네 놀이에 어울려줄게. 자세히 설명해줘.」
「고마워. 화내도 괜찮았는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너희들로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확실히 공략파 중에는 안전만을 중요시하는 중층이나 하층 플레이어를 깔보는 분위기가 있고, 안온하게 지내는 그들을 《간사하다》고 생각하는 본심도 많이 품고 있겠지. 그래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 정도로 그치고 리즈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함 없는 현실이니까.
그래서 그 대신 리즈가 하고 싶은 것을 재촉하기로 한 것이었다.
리즈가 말하는 《놀이》란 중세 유럽 세계에서 기사 서임식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기사가 모셔야 할 주군에게 검을 바치고, 군주인 주인이 그 검을 받아들여 기사로 임명하는 그런 의식.
물론 나와 리즈는 기사도 아니고 왕도 아니다. 대등한 입장인 친구끼리라는 스탠스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식적 의미에서의 기사 서임식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리즈가 나를 기사라고 말하고 자신을 공주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의미다. 본인은 「공주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라며 쑥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정확히는 기사 서임식을 변형한 것으로서 검을 수여받는 의식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장소는 리즈의 공방이고,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기에는 생활감으로 흘러넘치는 곳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 옷차림은 낡고 더러워진 검은 레저 코트에다 같은 색을 한 셔츠와 바지이고, 리즈도 급사라고 착각할 것 같은 에이프런 드레스 차림인 상태다. 나도 리즈도 디테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이자 추억이지 형식 같은 게 아니다.
리즈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 자세인 채로 리즈가 만들어준 칼집에 들어간 다크 리펄서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들어올려 리즈에게 건넸다. 리즈는 말 없이 검을 받은 뒤 칼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검의 날을 뉘여서 내 어깨에 놓는다.
「검은 검사 키리토, 당신에게 이 검――다크 리펄서를 하사합니다. 어둠을 없애는 칼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끊임없이 연구에 힘쓰도록 하세요. 그리고 약한 사람에게 상냥하고, 강한 자에게 꺾이지 않고, 용감한 그 몸을 검으로 삼아 괴물을 이기고, 때로는 방패가 되어 사람들을 지킬 것을 지금 이 검에 맹세하세요.」
「맹세합니다.」
「검사로서의 맹세는 여기에. 지금 이때를 기하여 어둠을 없애는 칼날은 검은 검사 키리토가 수령합니다.」
의외로 본격적이구나.
이때의 나는 얼빠지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몸도 맹세합니다. 검의 죄는 검사에게만 돌아가지 않고 그것을 만든 나도 그 책임을 지겠다고 지금 여기서 소리 높여 선언――」
「리즈!」
반사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그 기세로 일어서 있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리즈의 각오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얼간이였다. 멍청하기 그지 없는 남자였다.
리즈가 이유도 없이 이런 제안을 해올 리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인 놀이라고 여긴 나는 얼마나 생각이 얕았단 말인가.
「뭐야 정말. 모처럼 부끄러운 대사를 참고 말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끝까지 말하게 해달라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래, 알고 있어. 키리토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나도 그 죄를 함께 짊어져주겠다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단언하는 리즈를 보고 머리에 피가 솟구쳐올랐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릴 하는 거야.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아! 내 잘못은 나 자신의 것이지, 결코 누군가에게 건네도 될 것이 아니야……!」
시작의 거리에서 클라인을, 그 동료를, 그리고 많은 초심자 플레이어를 버렸다. 제1층 플로어 보스전에서는 이 손으로 직접 플레이어의 목숨을 빼앗았다. 래핑 코핀이 상대라 해도 한층 더 플레이어 두 명을 이 손으로 죽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궁 구역에서도 플로어 보스전에서도 내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죽게 놔둔 목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버린다는 목숨의 취사 선택을 오늘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 왔던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 발밑에는 많은 플레이어의 피와 시체가 전면에 깔려 있다.
사람의 죽음을 없었던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 삶을 결코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게임을 클리어한다. 그 일념으로 오늘까지 살아왔고, 장수해 왔다. 내 죄는 오직 싸우는 것으로만 죗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서.
그런 내가 어떻게 이제 와서 죄도 벌도 내던질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중량감을 다른 누군가가 짊어지게 한다는 무책임한 짓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격앙하면서 노려보지만 리즈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가 짊어지는 것은 지금부터 앞으로 네가 짊어질 죄의 반이야. 네가 내 검을 휘둘러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 죄는 너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짊어지는 무게가 되는 거야.」
「지금부터……앞으로?」
「그래. 왜냐하면 너는 또 다른 플레이어와 싸울지도 모르잖아. 행방을 알 수 없는 래핑 코핀 단장인 PoH하고.」
「……읏!」
나는……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뭐라고――대답하려고 했을까.
「키리토, 잘 들어. 너한테는 족쇄가 필요해. 누군가가 브레이크가 되지 않으면 너는 많은 것을 너무 짊어지게 될 거야.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렇게 될 그릇이야. 그러니까 이 검을 받아. 받아서 너 자신을 묶어둬야 해. ――부탁이야, 내 검이 널 지켜준다고, 그렇게 믿게 해줘……!」
헐떡이듯이 숨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리즈는 결코 나한테 싸우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베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괴로웠다. 리즈의 너무나 장렬한 헌신과 각오에 떨리는 손이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리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 나도 비슷한 얼굴로 리즈와 마주 보고 있겠지.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 자신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은 적은 없었다.
「……그림록도 충고했어. 내가 그렇게 위험하게 보이나?」
「보면 알 수 있어. 래핑 코핀 토벌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는 것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 상당히 참담한 상태야. 무리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여. 그러니까 공략을 잊고 쉬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나와 함께 할 필요는 없잖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일 뿐이야. 네 키리토의 힘이 되고 싶어. 네 부담을 가볍게 해주고 싶어. 내 마음은 내 것이야. 네가 부정하도록 하지는 않을 거야.」
허리에 손을 대고 가슴을 피면서 소리 높여 선언하는 리즈는 아름다웠다. 늠름하게 서 있는 그 모습에 공략파의 모범으로서 계속 활약하는 아스나의 모습이 겹치면서, 친구끼리는 이런 점까지 닮는 거냐며 이상한 감개를 않았다. 눈부실 정도로 매력적이어서 빛나듯이 약동하는 생명력에 압도당해버린다.
검은 검사라고 불리고 있어도 내막은 이렇다. 단 한 명의 여자애한테도 이길 수 없는, 그 정도인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그렇기 때문에 이것으로 분기할 수 없으면 거짓말이겠지. 리즈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해놓고, 각오를 하게 해놓고, 나 자신이 언제까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될 리가 없다.
힘들게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면서 몸 안에 숨은 무기력의 벌레를 내쫓으려고 단전에 힘을 넣었다. 천천히--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간다.
길고 괴로운 침묵을 사이에 둔 끝에 마침내 각오를 다진 나와 리즈의 시선이 교차했다.
「내 왼손의 장비 슬롯은 리즈의 것이고, 리즈가 만든 검만 사용할 거야. 이 게임이 클리어될 그때까지 계속. ……그거면 충분할까?」
정말로, 그것으로 후회하지 않을 거지? 리즈.
「물론이지! 네 검은 언제든지 내가 최고 상태로 정비해줄게!」
내 말에 응하는 목소리는 명랑하고, 그 음색에는 탁함이 전혀 없다.
이것으로 내 죄는 동시에 리즈의 죄가 되었다. 내가 검을 피로 물들일 때 그 죄업은 리즈도 짊어지게 된다. 리즈가 그러기를 바랐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좋았던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목소리는 있다. 리즈가 짊어질 필요가 없는 무거운 짐을 맡겨버린 것은 아닐까 망설이는 심정도 있다. 그런 내 번민 모두를 날려버리듯이 리즈는 꽃이 필 것 같은 미소로 기뻐했다. 튄 음성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심정이 담겨 있어서 오히려 내가 한 방 먹은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하라.
그림록의 진지한 목소리가 반향하듯이 뇌리에 울린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새빨갛게 물든 두 손을 환시한 그날 이후로 내 악몽이 끝날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이 세계에서 탈출하게 된다고 해도 두 번 다시 키리가야 카즈토로서 올곧게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단념해 왔다.
하지만.
내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만.
계속 걸어가자. 고개를 들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분명 그것이 살아간다는 거겠지.
「리즈, 연극을 계속하자.」
「뭐? 나로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충분한데.」
「모처럼이니 끝까지 해 두자고. 네 연극도 물이 오른 상태잖아.」
눈을 휘둥그렇게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내는 리즈. 그런 리즈에게 놀리는 투를 섞은 말을 하고 반론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나 참, 하고 뺨을 부풀리면서도 성실하게 연극을 재개해주는 리즈는 정말로 사람이 좋았다.
연극을 계속한다고 해도 금방 끝난다. 정식적 순서를 밟은 기사 임명식도 아니니까 당연하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놀이이고, 마음대로 어레인지를 더한, 굳이 말하자면 아인크라드판 《검의 맹세》다. 아인크라드는 검의 세계니까 그 정도로 해둬도 괜찮겠지.
내 어깨에 얹혀진 검이 리즈의 슬하로 되돌아갔고, 리즈는 검을 칼집에 담은 뒤 재차 나한테 하사하려고 한다. 그대로 내가 검을 받는 것으로 이 의식도 끝난다--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내 어레인지다.
「리즈, 손 내밀어봐.」
「손? 뭐 괜찮긴 한데.」
예정에 없는 내 말에 괴이쩍은 표정을 띄운 리즈였지만, 딱히 경계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다. 접하는 것을 곤혹스럽게 하는 가는 손목과 손가락끝에 눈을 돌리고, 부서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이 섬세하게 리즈의 손을 잡았다. 접하는 피부를 통해서 전해지는 은은한 열기에 자연스럽게 뺨도 느슨해져버릴 것 같다.
표정을 굳히고 엄숙한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리즈의 왼손 장갑에 살짝 입술을 댔다.
「지금 여기서 리즈에게 맹세하겠어. 내가 가진 힘을 다해서 반드시 이 세계를, 아인크라드를 끝내겠어. ――약속할게, 리즈.」
그것은 내 맹세다. 결코 달리할 수 없는 완수해야 할 결의이자 약속이다.
《키리토》가 《소드 아트 온라인》을 클리어하겠다고 누군가 앞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선언한 것이다.
「뭐, 뭐, 뭐――」
리즈는 자신에게 공주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리즈가 자기 자신을 모를 뿐이다. 지금 내 앞에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애는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나 온 매력이 넘치는 여자애들에게 지지 않는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나 같은 녀석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이 난봉꾼――――!」
리즈가 그렇게 크게 외치는 것을 기분 좋게 들어주면서.
오랫동안 내 안에 침전하고 있던 검고 무거운 것도 마침내 조금씩 개여 가는 감촉을 나는 이때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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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룡의 둥지 출현 설정, 백룡이 스스로 재촉하는 탈출 방법은 제 작품의 독자적인 설정입니다.
《황금사과》가 중층 계층에서 탑 길드 중 하나인 것과, 《그리셀다》 살해 과정에 《슈미트》가 관련되지 않은 것도 원작과는 다릅니다.
태그 : 소드아트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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